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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12월 14일 설교 나그네 길의 소망
벧전 1장 3-4절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그리스도의 죽은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오늘 설교의 제목은 매우 시적입니다. 시는 길게 쓰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문 매우 짧게 압축된 언어로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가장 짧은 시는 쥘 느나르( Jules Renaed)의 "뱀"이라는 시 입니다. "뱀, 너무길다." 이게 다입니다.뱀 같은 악의 세력, 악한자들, 악한 세태가 너무 오래된 것을 표현했다고 저는 이해 합니다.
오늘 설교는 시적인 제목에 맞게 시적으로 압축된 말로 써서 이제것 한 설교중에 가장 짧은 설교가 될것 같습니다.애플의 핸드폰과 그래픽 디자인을 한 조너선 아이브도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디자인은 더하는게 아니라 빼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그 말처럼 뺄것 빼고 딱 전할 말씀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 하나님 나라를 향한 나그네 길은 멀고 험하나 소망가운데 살자 ."이렇게 요약하고 끝내진 않겠습니다. 그래도 서사시 구조는 되도록 해보겠습니다.
이제 17일 정도만 지나면 2025년이 지나고 2026년 새해가 시작됩니다. 이맘때가 되면 한 해를 자연스레 돌아보게 되고 새해의 소망에 대한 생각이 들게 됩니다. 지난 한해는 어떠셨습니까?다가오는 새해에 마음에 담고 싶은 소망은 무엇이십니까?
오늘 설교는 사실 그런 것에 대한 것은 아니니 대답을 생각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조금더 넓게 우리의 삶의 길에 대해서 다뤄보고자 합니다. 성경에는 여러 메타포가 있는데 그중에 큰 내용을 담고 있는 것중에 하나가 바로 "길"이라는 것입니다. 광야길, 방랑길, 생명의 길, 진리의 길, 길되신 예수님 등등 길에 대한 메타포가 많이 나옵니다. 오늘은 그중에서 나그네 길과 소망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경에서 나그네에 대한 말은 구약과 신약에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의미로 나옵니다. 야곱의 이 말이 유명하지요."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나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이 말에서 나그네 삶이란 한마디로 "험악한 세월"을 견디며 사는 자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나그네는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정착지가 없으며 사회적 안전망에서 벗어나 있으며 하루살이처럼 내일이 보장되지 못하는 삶을 사는 자 입니다. 폭력느와르 영화 아저씨에서 원빈이 " 내일을 생각하는 놈은 오늘만 생각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라는 비슷무리한 이야기를 멋있게 합니다만 제가 지난번 하루살이 쥬터뷰 영상 보내드린 것을 보면 하루 밖에 살지 못하는 하루 살이의 짠한 삶이란 비극적이고 슬픈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나그네 삶은 대체로 이런 비극적이고 슬픈 삶을 사는 존재로 비유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애굽에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을 표현할때도 애굽에서 나그네 되었던 존재라고 (출 22:21) 언급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 대표적인 사회적 약자그룹이 과부 고아 인데 거기에 들어가는 것이 나그네 입니다.(신10:18-19,렘 7:6)
오늘 본문 요절이 있는 베드로 전서에서도 성도들을 "흩어진 나그네"로 부릅니다. 핍박으로 인해 정든 고향을 떠나 이방나라에서 어떤 법적인 보호도 받지 못하고 극도의 가난과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 또다시 올지도 모르는 핍박을 걱정하는 모습이 나그네와 닮았다고 본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나그네 이미지는 성경에서 인간을 표현할때 근원적인 고향인 "에덴 동산"에서 범죄로 인해 쫒겨나 에덴의 동쪽으로 점점 멀어지면서 끊임없이 ,쉼 없이 방황하는 존재로(restless wanderer) 표현하는 것과 매우 닮아 있습니다. 사실 인간은 사는 수준이나 지위나 여러 상황이 좋을지라도 따지고 보면 근원적인 낙원을 잃어버리고 험한 세상으로 던져진 나그네와 같다고 보는 것입니다. 부자, 권세자, 건물주는 좋은 환경을 가진자로 편하게 사는 것이지 성경에서 말하는 "잘 사는 복된 삶", 샬롬과는 거리가 있는 삶입니다. 그들의 처지가 않되어 봐서 모르겠지만 그들도 "다음은 어디로 가지. 내일은 무엇을 하지.왜 이리 기쁨이 없고 속이 휑하지" 등등 근원적인 낙원에서 멀어진 방랑하는 나그네 삶을 사는 것은 매한가지 입니다. 그런 삶을 살다가 결국은 영원한 형벌과 고통에 처해지는 존재로 가게 된다는 비극적인 이야기가 성경이 말해 주는 것입니다.(계20:13-14, 21:8)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나그네 삶은 매우 비극적이고 시의 종류로 치면 "비극시"의 삶을 사는 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비극적인 인생의 모습만을 보고있으면 인생이 슬퍼지고 우울하고 소망을 가지기가 힘이 듭니다. 비관론자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나 사는 현실적인 처지가 궁색하다면 더욱 그런 생각으로 흐를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그런데 도시에서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인하여 삶의 터전을 잃어 버리고 어쩔 수 없이 이주하여 나그네 심정으로 사는 분들이 늘고 있습니다. 또 수도권 경제력 집중으로 인하여 지방 고향을 떠나 떠돌이처럼 이곳 저곳 옮겨 다니며 사는 분들도 늘고 있습니다. 거꾸로 저나 정자매님 ,김집사님처럼(아직 발표는 않났지만) 지방으로 이주하여 사는 경우도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더 나아가 해외로 어쩔 수 없이 이주하여 디아스포라가 되어 사는 분들고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삭 선교사님은 호주에서 이런 사람들을 섬기시고 계십니다.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듯이 케이팝 데몬헌터스의 주제곡인 "골든'은 미주에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 한인 이세들의 애환과 어려움이 녹아든 곡입니다. 그래서 동일하게 그런 심정을 느끼는 많은 사람들의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서구인들의 가장 깊은 감정은 본향을 잃고 그곳을 그리워하는 그리움이라고 하는 글을 어디서 본 듯 합니다. 그래서 그런 그들에게 큰 위로가 된 노래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자본주의 사회든, 사회주의 사회든 근본적으로 공의와 정의의 문제해결에 실패하고 현대판 피라미드사회처럼 세상이 되어가고 있어서 구조적으로 나그네적인 삶을 양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느끼는 어려움은 이생망으로 집약되어 표현되는 것 같습니다. 지난 11월에 딸이 작년 11월 어느 미술관에서 구입한 엽서로 보낸 것이 집에 도착을 하였습니다. 거기에는 한 젊은이가 느끼는 어려움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습니다. 어렵게 허락을 받아 조금 인용합니다." 1년뒤에 받는다고 생각하니 아직 25년도의 11월은 엄두가 나지 않는 느낌이다. 지금 하고 있는 고민들은 다 해결된 상태일까? 새로운 고민이 찾아왔을까? 미래를 생각하면 온통 물음 투성이다. 해결해야 하는건 많은데 1년이란 시간은 나이가 들수록 더 짧아지기만 한다." 목사님 아드님도 프랑스 파리에서 쉐프로 일하는데 처음 일년은 새로운것 경험하고 좋았는데 ,이년차에 들어가서는 향수병이 조금씩 돋아난다는 이야기를 목사님께 들었습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반응이지만 짠한 마음이 들었습니다.요즘에 저는 그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한식 세계화의 흐름을 타고 세계적인 쉐프가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있습니다.
조금더 시야를 넓혀보면 이,팔 전투와 우, 러 전쟁, 세계 곳곳의 내전등으로 난민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들의 고통을 어떻게 필설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시리아 내전으로 난민들이 지중해를 작은 배로 건너다 전복되어 죽는 일도 있었습니다. M국의 이 선교사님은 아시아의 한 나라에서 이런 난민들을 간접적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찰리 채플린의 말처럼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은 어느정도 참인 것 같습니다. 더 가까이 내면 깊은 곳을 들여다 보면 더 비극적일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소망같은 단어는 희망고문이 될 가능성이 농후 합니다.
그런데 이와는 다르게 삶을 보고 세상을 보고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처지가 나그네와 같이 옹색하더라도 즐겁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오늘 보다 내일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슬픔이 있더라도 내일은 웃는날이 이를 것이라고 믿고 삽니다. 이런 것을 "낙관론자"의 삶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왕에 살거 구질 구질하게 살지 않고 즐겁게 살려고 합니다. 죽음이후는 알 수도 없고 죽으면 인생도 끝나니 살아 있을때 뭐 한가지라도 경험하고 더 해보고 살려고 합니다. 무슨 무슨 기념일은 기가막히게 만들어서 즐겁게 세리모니하고 살려고 합니다. 인생에 주어진 소소한 즐거움들을 최대치로 끌어올려 즐겁게 살려고 합니다. 버킷리스트도 만들어서 열심히 저축하고 모아서 이를 하나 하나 지워가며 성취감을 맛보기도 합니다. 나름 지혜롭고 즐겁게 인생을 사는 모습이 좋아 보입니다. 거창한 버킷리스트는 아니어도 소확행적인 것을 추구하며 소소하게 즐거움과 만족을 누리며 사는 것도 한 트렌드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런 낙관론자들은 고난에 처해도 그런류의 상상을 하고 견뎌내려 합니다. 그러나 오늘의 고난에서 벗어나는 내일이 닥치지 않으면 비관론자보다 더 크게 낙심하고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빅터프랭클 박사가 쓴 "죽음의 수용소"를 보면 수용소에 갇혔던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시즌과 새해 시즌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가 되면 전쟁이 종식되고 자신들이 해방되리라는 낙관론에 있다가 그것이 일어나지 않으니 절망하고 면역력이 손상되어 죽게 되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보다 심각한 것이 있습니다. 낙관론에서 극단적으로 나아가면 소위 "쾌락주의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예전에 미국과 유럽에서 마약을 많이 한다고 했었는데 이제 우리나라도 마약청정국이 아닙니다. 통계로도 이것이 입증되고 있습니다. 젊은세대에서 늘어나는 것이 매우 않좋은 신호입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니 살아있는 동안에 최대한 쾌락을 추구하려는 마음에서 선을 넘는 일들이 벌어지게 됩니다. 그렇케 살다 쾌락과 낙관의 한계에 봉착하면 비관론자보다 더 급속하게 삶이 무너지게 됩니다.
이런 비관과 낙관에서 조금 비켜난 삶이 달관론적 삶입니다. 삶을 관조적으로 저 하늘에서 바라보듯이 사는 삶입니다. 기쁜일도 슬픈일도 이또한 지나가리라 하면서 도의 경지에 이른듯이 살아갑니다. 봉황의 뜻을 참새가 어찌알리요 하면서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깨우친듯 말을 하고 삽니다.
꼭 그런 말을 하지 않아도 슬픔과 기쁨을 두루 경험하고 살다보면 자연스레 그런 경지에 조금씩은 이르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내가 무엇인가 큰 어려움과 고통을 겪고 있는데 산전 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분의 따뜻한 말한마디,"그거 아무것도 아냐 걱정마" 이런 말은 정말 위로가 되지 않습니까?
70,80,90,100세를 사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툭 한마디 던지는 말, 이야기들은 마법같은 효과를 일으키지 않습니까? 영화 미나리에서 할머니가 손주들에게 그런 존재였고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라는 책에 나오는 할머니 어르신의 말이 그러합니다.이런 류의 말이었습니다." 아픔을 겪는 사람과 연결될때 진짜 어른이 된단다."
또 어떤 사람은 삶의 도를 닦다 모든 것은 죽음과 함께 무로 돌아간다는 깊은 경지의 깨달음을 얻고 집착의 삶에서 벗어나 자연을 벗삼고 세상사에 초탈한 듯이 살아가는 분도 있습니다.범인이 범접할 수 없는 삶의 모습입니다. 어찌보면 웬만한 신앙인보다 훌륭한 모습의 삶 같기도 합니다.
사실 솔직히 고백하면 이런류의 삶을 사는 분들의 내면세계를 다 이해하지도 깊이 알지도 못합니다. 다만 그 주장이 죽음이후의 삶에 대해서는 깊이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것과 연계된 현실의 삶에 대해서도 잘 이야기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설사 한다 해도 스스로 자기 구원을 얻는 길인지라 너무 어렵고 힘든 수행의 길이 됩니다. 이는 물리적 현실에서 겪는 어려움과는 차원이 다른 고행의 길이 됩니다.
물론 저는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성과 하나님의 홀로 하나님 되심을 굳게 믿으며 증거 합니다. 다만 이 자리에서 해탈이니 득도니 이런것과 연계된 논쟁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달관론적인 삶의 어려운 현실과 한계를 이야기 하려는 것 뿐입니다.
그러면 믿는 우리들이 걷는 길, 삶은 무엇이란 말입니까?베드로가 성도들을 흩어진 나그네라고 부른 것은 나그네 삶의 어려움만을 담고 있는 의미는 아닙니다. 신자는 이땅의 비관론자의 길, 낙관론자의 길, 달관론자의 길을 가다가 십자가 예수님을 만나서 죄짐을 벗고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나그네의 삶을 시작한 자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매튜 에머슨은 요한 계시록을 해설한 책을 아주 간단하면서도 에센스만 담아 저술 했는데 그 제목이 "십자가와 보좌 사이" 입니다. 그 의미를 생각해 보면 나그네 길의 여정을 십자가에서 시작해서 계시록 4-5장 중심환상에 나오는 성삼위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에 이르는 길이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참 멋지고 의미깊은 표현이라고 여겨집니다.나그네 삶은 나그네 삶인데 정처 없이 돌고 돌고 돌아버리는 떠돌이 삶이 아니라 분명한 좌표가 있는, 푯대가 있는 ,소망이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존 번연은 "천로역정"에서 크리스찬의 여정으로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소설로 저작하였습니다. 요한은 요한 계시록에서 이것을 풍부한 그림언어로 기록하였습니다. 창조 타락 구속 회복의 거대내러티브 즉 거대 서사가 완성되는, 새 에덴의 회복을 감격스럽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소망가운데 사는 나그네 삶을 확실한 믿음과 소망위에서 사는 확관론자의 삶이라고 이름을 지어봤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흩어진 나그네의 살을 살며 고생하는 성도들을 돕는 편지를 쓰면서 이렇케 시작하지 않았습니다."아이고 얼마나 힘드십니까? 많이 힘들죠. 힘내세요" 이런류의 말이 먼저 나와야 할텐데 전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말을 하였는데 찬송의 이유에서 거듭남과 산 소망을 바로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산 소망을 부연해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을 잇게 하는 것이라고 부연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이 흩어진 나그네로 이땅에서 살고 있지만 결코 정처 없는 것도 소망이 없는 것도 푯대가 없는 것도 아님을 들어내고 있습니다. 나그네라는 이미지는 갖고 있지만 소망이 분명한 나그네라는 것입니다. 종착점이 분명이 있는, 종말의 소망이 분명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 깊게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두 가지 점에서 분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그럼 이땅에서의 소망은 다 부질 없는 것이냐 반문할 수가 있습니다.
또 혹자는 위의 반문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나라의 소망과 대비해서 이땅의 삶을 쓸모 없는 삶이라 여기고 사는 ,난파선에서 뛰어내리는 모습과 비슷한 균형잃은 종말론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기도 합니다.이것을 가칭 난파선 종말론 모델로 불러 봅니다. 종말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 끝장나는 파괴론적 종말입니다. 이땅에서의 모든 활동은 무의미하며 오직 난파선에서 구원하고 그 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는 것만이 유일한 소망이 됩니다. 여기서 세상에서 도피하는 도피론적 삶이 나오고 세상에서 하는 일의 소중함도 가치도 평가절하되어 버리게 됩니다.
또 어떤 분은 구원은 따논 당상이니 이땅에서는 마음대로 살아가려는 구원파적 종말론 소망을 가지고 사는 분도 있습니다. 구원과 종말론적 소망이 따로 국밥처럼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구원은 구원이고 종말론적 소망은 그저 종말에 가서나 의미있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이들에게 정말 제일 효율적인 사람은 사는 동안에는 자기 마음대로 마음것 살고 죽기 10분전에 회개하고 구원받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 상에서 죽기 전에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이가 모델이 될 것입니다. 이를 가칭 따로국밥적 종말론 모델이라고 이름붙여 봅니다.
여기서 신앙과 삶이 유리된 모습들이 나오게 되고 일반 세상사람보다 못한 모습을 숱하게 보이게 됩니다. 난파선적 종말론 모델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그래도 구원의 열정이나 헌신등이 있는데 따로국밥적 종말론 모델은 정말 답이 없습니다. 구원을 10원만도 못한 싸구려 구원으로 만들어 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게 현세대의 많은 믿는자들의 모습인 것이 사실임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믿는 우리가 지향해야하는 종말론 모델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그것은 난파선 종말론 모델도 아니고 따로국밥적 종말론 모델도 아니라면 무엇이 되어야 할까요? 조심스럽지만 성경전체의 가르침과 계시록의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계21:5)하시는 말씀대로 인간과 만물이 첫 창조보다, 새롭게 창조되는 새창조, 만물을 쓸어버릴것은 쓸어버리시고 회복될 것은 회복되고 새롭게 하시는 가칭 회복론적 종말모델이 되어야 하리라고 봅니다.
이런 관점을 가지게 될때 이땅에서의 헌신과 노력들이 비로서 제대로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15장 58절 맨 마지막에서 이를 말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이것에 대해서는 전에 함께 요한계시록 공부했던 것을 참조하시고 나중에 다시한번 다루게 될때 조금더 깊은 이해를 하게 되리라 기대합니다.
그런데 이런 관점을 가지게 되었다고 나그네적인 성도의 길이 자연스럽게 가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그네 길은 나그네 길입니다. 결코 녹녹치 않은 여정입니다. 초대성도들은 핍박을 심하게 받았습니다. 지금의 세상도 만만치가 않습니다. 내외적인 어려움, 유혹 등등이 우리들의 마음을 잠식해 들어오길 잘합니다. 정신없이 현실에서 살다보면 그냥 9988214 적인 것이 자연스런 소망이 됩니다. 이땅의 네플릭스등 재미 있는 것이 많은데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별로 재미가 없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별로 소망이 생기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더군다나 현실에 그럭저럭 무탈하게 지내고 또는 잘나가고 있는 상황이라면 종말론적 소망이 그리 다가오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종말적 상황들을 예시적으로 한번씩 경험하게 되면 달라지게 됩니다. 저도 폐업으로 2년여에 걸쳐서 일차적 종말적 상황을 겪고 보니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 간절하고 하나님의 회복의 손길이 간절해졌습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영화의 시작과 끝을 보면 대략 중간은 어떻게 흘러갈지 알게 되고 어떤 장면이 나와도 당황하지 않는 것처럼 어떻게 살아갈지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창세기와 요한 계시록으로 처음과 끝을 보여주고 중간부까지 다 보여주는 성경이 주어져 있습니다.
특히 종말론 소망을 보여주는 요한 계시록은 우리의 삶의 종말이 어떠할지를 알려주기에 그 소망에 근거해서 지금의 현실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가르쳐 줍니다. 소망가운데 인내를 하게 합니다.
여기에 쓰이는 인내는 소극적으로 버티고 억지로 참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인내가 휘포모네인데 이는 소망가운데 적극적으로 파이팅하듯 기쁨가운데 인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왜 아니겠습니까?죽음으로 모든 것이 파국을 맞이하고 끝장나는 것이 아니라 계시록의 놀라운 순간들, 회복의 날들, 회복된 관계, 나라가 기다리고 있는데 무엇인들 참아내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조금더 나아가서 매일 매일 그 소망에 푹 잠겨서 살다보면 살아서 천국을 경험하며 이땅에서 부터 천국을 사는 것과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각도도 다르고 가르치는 내용도 다르지만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 자신이 섣부른 낙관론과는 많이 다른 의미론적 소망에 푹 잠겨서 살았을때(물론 이것도 니체 철학에 근거해서 한계가 있긴 합니다만) 그는 그 참혹한 상황에서도 수용소 사람들의 심리반응을 기록하며 살았습니다. 책 제목과 부제도 특이합니다. 제목이 의미에의 추구로 나오지만 실제 제목은 Nevertheless, Say yes to life 이고 부제는 A Psychologist Experience the Concentrtion Camp. 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원리를 적용할 수 있는데 훨씬 위대하고 온전한 종말론적 소망에 푹빠져 살게 되면 현실의 고난을 넉넉히 감당하며 자신의 삶속에서 하나님이 주신 소명의 소망대로 낙심치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이는 종말론적인 소망안으로 푹 잠겨 들어가는 것과 제가 지난 여름 수양회때 전한 예수그리스도안의 은혜로 들어가는 것과 비슷한 원리 입니다. 현실의 절망적인 상황에 휘말려 들어가기 보다 종말론적 소망안으로 깊이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럴때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 이사야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비슷하게 말하였습니다. "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1)여기서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라는 말이 영어로 Hope in the Lord로 나와 있는데 하나님안에 잠기라는 뜻이지만 이 말의 원의미는 몸을 베베꼬듯하며 절박하게 쳐다보고 매달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렇게 종말론 소망을 앙망을 할때 월터 부르그만의 말처럼 현실적 한계적 상황에 꽉 억눌리고 막힌 상상력의 전복현상이 일어나고 새힘가운데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도 마태복음 5장에서부터 나오는 산상수훈에서 이런 삶을 이땅에서부터 살아가야하며 살아갈 수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여기서도 비슷한 원리가 나오는데 심령이 가난한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 마음이 청결한 자등 비슷한 심령이 될때 천국에서나 맛볼 축복을 맛보며 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땅에서 이런 삶을 살아보고 누리고 경험하지 않으면 나중에 하나님나라에 갔을때 매우 당황스럽지 않겠습니까? (이 말은 광주 소명교회의 박대영 목사님이 팔복 강해 하면서 하신 말씀인데 도전이 되었습니다. 저도 한 마디 거들면 이땅에서 천국을 경험하고 누리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갔을때 여기가 아닌가벼, 내가 못올때 온듯한 반응을 보이지 않을까요?)
제 이야기 잠간 하겠습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제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저를 관통한 말씀이 도움이 될까해서 드리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60갑자 한바뀌 돌고 난뒤에 크게 낙심이 되었었습니다. 대학생때 지성인 복음화의 환상을 보고 그길로 20년 미친듯이 살았습니다. 단체가 분리될때 일반 지역교회나 다른 길을 택할 수가 있었지만 , 저는 그 소망을 붙잡고 작은 공동체 교회를 동역자들과 시작했습니다. 지난 23년은 은혜도 있었지만 나타난 결과나 열매로 볼때는 시간이 순삭되어 버린 것과 같은 심정이 들었었습니다. 이제 나이도 들어서 더이상 무엇을 해볼수 없는 나이가 되어 버렸습니다. 더욱이 폐업을 하고 앞길이 막막해질때 아들이 지나가는 말로 "아빠는 열심히 신앙생활한 것 같은데 지금 상황은 조금 아쉽다"라고 가볍게 말을 했는데 저는 그 말에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아픔을 느끼었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힘든 시간을 거치면서 하나님은 제 마음을 만지셨고 모든 것이 티끌과 재같은 제삶에 주어진 은혜였음을 깨닫게 도우셨습니다. 또 지난 10년간 요한계시록 공부하고 하나님나라의 소망을 부지런히 심어오셨음을 돌아보게 하셨습니다.
무엇보다 니글의 이파리를 읽고 또 읽으면서 비록 이땅에서 나무하나 그리지 못한 니글처럼 나무 이파리 하나 께작거리는 작은자의 삶을 살았을지라도 지향했던 방향성, 꿈 , 소망이 장래 하나님의 나라에서 놀랍게 이루어지리라는 가슴뛰는 소망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시를 쓸때 호를 "소엽," 작은 이파리 "라고 소망가운데 지었습니다. 더 나아가 가다가 중지 하면 간만큼 이익이다라는 여유도 부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시금 심신을 정비해서 하나님의 주신 소망들을 다시 붙잡고 나가고자 하는 소원을 주셨습니다. 요즘 제가 일어나 의식도 불분명할때 제일먼저 하는 것이 계시록 4-5장의 사람들처럼 천국 보좌에 계신 성삼위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마치 제가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찬송을 부르면 감동이 됩니다. 또 일터에서 아들과 좋은 치과을 만들어 보리라는 소망가운데 지금 열심히 공부하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그네 길인 성도의 길은 결코 쉬운길이 아닙니다. 우리는 비관론에 빠질 수도 있고 근거없는 낙관론에 있다 절망할 수도 있고 달관론적인 삶을 고행하듯 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요한 계시록에서 보이신,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나라의 소망을 확신하고 사는 확관론적인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믿음장 11장에서 말했습니다."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게 하고 소망을 바라보게 합니다. 또 바울은 로마서에서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롬 8장 37) 사랑도 우리로 힘을 내어 가게 합니다. 오늘 요절도 다시 읽습니다."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벧전 1:3-4) 소망은 우리로 고난을 겨우 겨우 견디는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견디게 하고 이겨나가게 하는 아주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에는 믿음 ,사랑,소망이 삼각편대를 이루고 나가야 합니다. 바울은 데살로나기 전서에서 이를 이렇게 언급했습니다."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께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사랑으로 이땅에 낮아져 오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구원의 은혜를 주신 주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또한 부활의 소망 하나님나라의 소망을 주신 소망의 주님을 감사 찬양합니다. 이를 믿음의 눈으로 실제를 보듯 보게 하시고 나그네 고난의 길을 확관론자가 되어 걷게 하시는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오늘 다룬 산 소망은 사도 베드로가 나그네 길을 걷는 고난에찬 성도들을 도울때 가장 먼저 전해준 말씀입니다. 그 뒤에 세세한 도움의 말씀이 나옵니다. 나그네길을 가다 정말 힘든 상황에 부닥쳤다면 무언가 해결책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문제에 휘말려 들어가기보다 산 소망에 대해 살피고 붙드는게 중요합니다. 혹시 지금 나그네 길을 가다 벽에 부닥쳐 막막함에 거하고 있다면 요한 계시록을 한번 읽고 산 소망에 대해 묵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혹시 기회가 된다면 내면 이맘때 도착하도록 미래로 편지나 엽서를 솔직한 심정과 소망을 담아서 써보시고 부쳐 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무엇을 하든지 그를 통해 막막함이 은혜와 소망이 되어 먹먹함으로 바뀌어 가게 되기를 응원하며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께서 주신 새 하늘과 새땅의 소망, 온전히 새롭게 될 하나님나라에 대한 소망에 굳게 서서 2026년 새해에도 나그네 길을 기쁨과 담대함으로 함께 걸어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옆에 있는 분에게 " 올 한해 나그네길 걸어오느라 애쓰셨습니다. 새해에도 함께 잘 걸어갑시다."라고 해보시겠습니다.
이번 설교에서는 "십자가와 보좌사이" (매튜 에머슨)" 나무와 이파리(중간의단편 니글의 이파리)(존 로날드 로엘 톨킨)"그리고 류호준 교수님의 성경의 큰 메타포중 하나가 "길"이라는 말씀과 페북 포스팅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 드립니다. 그리고 설교가 간단했기에 오늘은 헤르만 헷세의 시와 제가 지은 시 포함 두 편을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흰 구름 헤르만 헷세
아, 보라 잊어 버린 아름다운 노래의
나직한 멜로디처럼 구름은 다시
푸른 하늘 멀리로 떠간다
긴 여로에서 방랑의 기쁨과 슬픔을
모두 스스로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구름을 이해 할 수 없는 법이다
해나 바다나 바람과 같은
하얀 것, 정처 없는 것들은 나는 사랑한다
고향이 없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누이들이며 천사이기 때문에
나그네 길 소엽 이학상
에덴의 동쪽에서
서쪽 사릿문으로 가는 길
머리에서 가슴을 지나 두 다리에
이르러야 걷는 길
막히고
돌고 돌고 돌아버리는
막막함
먹먹함 되서야
풀려나 가는 길
이미 이른 듯 하나
여전히
아직도 손에 잡히지 않는 길
멀고
멀기만 한 길
나그네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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